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인간관계 (문단 편집) ==== [[하이든]] ==== 하이든은 1790년 말 경에 [[런던]]으로 음악여행을 가던 당시 본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베토벤은 그 때 이 위대한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두 곡의 [[칸타타]](WoO.87,WoO.88)[* 한 곡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요제프 2세]]의 사망을 애도하는 곡이고 다른 한 곡은 요제프 2세의 동생 [[레오폴트 2세]]의 황위 계승을 경축하는 곡이다.]의 악보를 받아본 후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승낙한다. [[1792년]]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몇달 전 7월에 런던에서 돌아와서 빈에 머무르고 있던 하이든의 제자로 들어간다. 그동안 동네 음악가들에게만 배우다가 모처럼 당대의 거장에게 배우게 된 베토벤의 기쁨과 희망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가르침을 받게 되자 하이든에 대한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이든은 분명 작곡가로는 1급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의문부호가 한두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느긋한 성격 탓인지 2차 런던 여행에 대한 준비에 치중했던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하이든은 기대했던 만큼 베토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언젠가 베토벤이 작성한 악보를 하이든이 고친 후에 돌려주었는데, 다른 음악가인 요한 밥티스트 셴크(Johann Baptist Schenk, 1753~1836)는 이 수정된 악보를 보고 하이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베토벤은 자신의 교육에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하이든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 외에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해 악평을 하거나 출판을 반대하여 베토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C단조의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은 신예 작곡가의 작품 치고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하이든은 피아노 3중주를 45곡 가량 남겼는데, 최후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그나마도 이 곡들은 베토벤을 가르친 이후에 작곡됐다) 현악기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바이올린이 피아노의 고음부(오른손부)를, 첼로가 피아노의 저음부(왼손부)를 따라가거나 보강해 주는 구성을 갖고 있고 연주시간도 대체로 15분을 넘기지 않는다. 반면 베토벤이 작곡한 op.1의 3중주 3곡은 전개부가 굉장히 확대돼서 연주시간이 30분에 육박하는데다 현악기들의 독자성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하이든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다만 op.1의 3중주는 중기 이후에 씌어진 3중주에 비하면 규모 대비 다채로움이 부족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하이든 입장에서는 좀더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결국 베토벤은 자신과 너무 성향이 다른 하이든에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1년여만에 하이든의 휘하를 떠나면서 사제관계를 청산한다. 베토벤은 후에 "하이든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크게 실망했었다. 물론 이 말은 하이든이 배울게 없는 시시한 음악가라는 뜻이 절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주지 않은 하이든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하튼 하이든과 결별한 베토벤은 전술한 요한 셴크를 비롯한 음악이론가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고 빈의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이탈리아 음악양식과 오페라 및 성악곡 작법을 배웠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빈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피아노 3중주 3곡(op.1-1,2,3)의 출판 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 제안을 가차없이 일축해 버렸다. 하이든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베토벤을 낮게 평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이든이 베토벤을 위해서였는데[* 당대의 거장 '하이든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베토벤의 운신에 꽤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어떤 분야에서 새로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그 분야의 대가나 유명한 사람의 제자 또는 협력자라는 타이틀을 내거는 일은 상당히 흔하다.] 자존감의 사나이 베토벤은 애초에 하이든의 제자 같은 타이틀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하이든은 자신의 2차 런던 여행 때 베토벤에게 제자이자 비서격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전에 사제관계가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 제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파국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헤어진 이후에도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과 독학을 병행하면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곡수법을 익혔으며, 그로 인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양식을 수립하기 전까지 그의 초기음악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등을 분석해보면 하이든의 작곡 방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수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비록 스승으로서 하이든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작곡가로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필적할만한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94년 하이든이 2차 런던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베토벤은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 3곡(op. 2-1,2,3)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리히노브스키 공작 저택의 연주회에 참석한 하이든에게 자신의 연주로 이 곡을 들려주었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통해 자신의 발전된 모습을 스승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이며 하이든은 대인배답게 이 소나타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특히 베토벤을 만날 당시 하이든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대음악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명세를 감당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베토벤처럼 자존심 강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후배 음악가의 비위를 일일이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하이든은 그냥 베토벤에게 중요한 것만 알려주고 세세한 음악공부 같은 것은 스스로 하면서 자신의 제자라는 후광을 입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반면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깨워줄 열의가 넘치는 스승을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의 이런 생각 차이가 사제관계의 결렬을 가져온 것. 하이든은 1809년에 사망했으므로, 베토벤이 자신을 딛고 본격적인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그가 1804년 발표된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한데 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 BBC에서 2003년 제작한 TV영화 [[https://www.imdb.com/title/tt0369400/?ref_=fn_al_tt_1|Eroica]]에서 영웅교향곡이 정식 초연전에 롭코비츠 공작 저택에서 비공식으로 초연되는 에피소드를 다뤘는데 하이든이 예고없이 찾아와 초연을 듣고 떠나며 코멘트를 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픽션이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의 하이든의 코멘트는 "Quite, quite new...Everything is different from today."였다.] 일각에서는 하이든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60번 C장조를 베토벤이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살짝 오마주한것같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하이든 60번에서 나오는 일부 동기가 엘리제를 위하여에 아주 조금 오마주처럼 들어가 있다는것이다. 물론 이는 베토벤이 직접 밝힌게 아니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